정치경제사회/기타

박정희의 실체....

[건희아빠] 2009. 3. 5. 11:52
먼저, 과거가 무슨 상관이냐, 미래가 중요하다. 과거에 대한 집착을 버려라..
라고 말하는 인간들에게....

청산되지 않은 과거는 미래를 끝까지 괴롭힌다는 것. 청산하지 못한 친일파 무리들 덕분에 대한 민국 돌아가는 꼬라지가 아주 엿같다는 사실을 직시하길.

그 다음으로, 나라가 어려울수록 서로 뭉치고 합심해야 하는데, 왜 상처를 들쳐내고 쑤시려고만 하느냐고 말하는 인간들에게..

상처는 그대로 두면 곪는 다는 것.. 방치하면  나중에는 잘라내야 한다는 것..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치료할 때에는 조금 아프겠지만, 그렇게 해야 상처가 낫는다는 사실을 깨우치길..


다음 글은 박정희에 대한 내용. 약간 무리한 부분도 있는 글이지만, 꼭 읽어 봐야 할 듯.
도대체 왜 박정희가 신격화 되는지 이해가 안됨..

1. 박정희는 카드돌려막기 선수

아래 보시며 알겠지만 박정희 경제는 결국 카드돌려막기 경제라고 밖에 볼 수 가 없지 않을까 해여. 박정희 재임당시와 지금의 경제규모가 1/10수준이니까 박정희 재임기간 무역적자 233억불은 지금으로 치면 2333억불정도 됩니다.

이걸 쉽게 비유하면 이렇게 되져. 마이너스 카드 뽑아다가 계속 써대고 나서 그걸 돌려막기 하다가 망하는 그런 경제가 딱 박정희식 경제였고 박정희부터 김영삼정권까지 우리가 산업화시기라고 떨벌렸던 기간의 실체인 것죠.

사실 박정희식으로 경제운영하면 언젠가 망하게 되어 있잖아요. 원조나 차관받아서 그 시기가 뒤로 늦추어질 뿐인 것이죠. 80년대 3저호황이 없었으면 대한민국은 남미나 아프리카 꼴 났다는데 100원 겁니다. 비근한 예로 김영삼때 결국 카드 돌려막기실패로 나라가 거덜난적이 있잖아요. 전두환때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아마 우리는 진짜 남미꼴 되었을 거에요. 80년대 3저호황을 보면 대한민국은 정말 억세게 운이 좋았던 것이죠. 소가 뒷걸음치다 쥐잡을 꼴이랄까 머 그런거에여.

사실 김영삼때 신용불량자 된 것을 DJ가 너무 빨리 복구하다보니 이런 문제의 심각성이 제대로 국민에게 인식이 안된 듯도 해여. 한 20년정도 천천히 극복했어야 국민들이 박정희식 경제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뼈져리게 느꼈을 텐데 말이에여. 아니 적어도 10년정도는 아이엠에프영향하게 철저하게 당해봤어야 하는데 5년만에 너무 빨리 아이엠에프를 극복한게 천추의 한이 될 줄이야.

사실 아이엠에프의 원흉이 바로 박정희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어요. 박정희의 만성적 적자구조경제, 카드 돌려막기경제야 말로 바로 그 카드돌려막기가 불가능하게 될 때 국가부도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최악의 시스템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박정희 임기내에 국가부도위기만 10번정도 되었다고 하니 박정희는 카드돌려막기 선수였던 셈이 되지요.




2. 국민소득의 증가와 수출에 가려진 만성적인 무역적자(이글은 펌글임)

1) 경제성장률문제.

박정희는 1인당 국민소득이 실질소득이 아닌 명목소득으로 계산할 때 82불로 시작하여 죽을 때인 79년 1636불을 기록하여 외형상 연평균 18%의 엄청난 고도성장을 이룩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환율도 엄청난 상승한다. 60년 12월까지 달러 당 65원이었던 환율이 집권시기인 61년 130원으로 두 배 상승한다. 또 박정희가 죽을 때 환율이 485원까지 상승한다.

다시 말해 박정희는 집권 직전 2배의 환율 상승으로 저평가 된 국민소득액(82$)에서 출발하여 환율상승 전(80년대 중반에 700원으로 상승)에 죽는 바람에(79년 485원의 환율이 그이후 6년간 유지됨) 고평가된 국민소득액(1,636$)을 유지한 상태에서 사망하여 국민소득은 형식적으로 상승하였으나 실질적인 상승의 폭은 의외로 크지 않다는 것이다. 좀더 자세히 보자.

62년 우리나라의 GNP(현재의 GDP와는 좀 다른 개념)가 1인당 연간 85불이었고 지금은 10,000불이 넘는데, 그게 모두 박정희 덕이라고 대답한다. 그런데 이 설명은 넌센스이다. 왜 그런고 하니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하여야 한다.

a. 우선 62년 당시와 지금은 물가수준이 현격히 차이 난다. 당시 이웃 일본의 1인당 GNP가 500불을 약간 밑 돌았고, 미국도 불과 2500불 수준이었다. 미국에 와서 보면, 70년대 퇴직 연금에 가입하신 나이 드신 분들이 그 때의 물가 기준으로 1달에 약 350불 정도 받으면 부부의 노후가 보장되려니 생각하였지만, 지금 그렇게 연금을 받으시는 분들은 그 돈으로 집세도 내지 못하고 무숙자가 되어야 한다.

그 이후 이 문제를 보완, 지금은 대부분의 민영 연금은 전부 적립식 펀드와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62년 GNP와 현재의 GDP는 그 개념도 다르고(GDP는 GNP보다 30% 많음, 물가 수준을 고려해야 하므로,단순 숫자 비교로는 실질왜곡위험.) 근데 이 의미 없는 숫자를 가지고 일부언론들은 박정희의 경제 업적을 찬양하고 있다.

b. 박정희가 비명횡사 했을 때, 1979년 대한민국 1인당 GNP는 약 930불 정도이고 그 사이 물가 수준을 고려하면 찌라시들이 선전하는 것처럼 아주 경이적인 것은 아니라고 볼수 있다. 62년과 79년은 18년의 시차가 나므로 물가가 의도적으로 약 5배 이상은 올랐으므로 실질 소득증가는 약 2배가 조금 넘는다.

c. 박정희는 10월 유신을 선포하면서 78년 말에 1인당 GNP 1000불을 목표로 하였으나 실제로는 1981년에 이를 달성한다. 지금 박정희 경제를 찬양하는 나이 드신 분들의 논리로 치면 이 후의 대통령들은 정말 기적 같은 일을 이룬 셈이다.

d.그리고 한 가지 더 첨부하면, 이 국내 총 생산량이라고 하는 숫자의 허구성이다. 왜냐하면, 어느 기업이 대구모 화학공장을 신설하여 1년간 영업을 한다 치자, 그러나 영업과 수출이 너무 지지부진하여 공장을 가동하였으되 모든 생산량은 재고로 누적되고 회사는 1년간 빚에 빚을 내어 운영하였어도, 그리고 이듬해 시장의 제품사양이 바뀌어 그 해 생산품은 모두 악성재고가 된다고 해도 GNP계산애서는 오로지 + 로만 계산될 뿐이나, 사실상 그 해 재고는 영원히 팔 수 없는 손실일 뿐이다.

이 부분은 회계를 담당하는 분들은 너무나 잘 알 것이다. 박정희 말년에는 이러한 악성 재고가 기업마다 누적되어 엄청난 양이 있었다. 나중에 전두환 시절 이를 출혈 수출하고, 어떤 경우는 1997년까지 끝내 정리 안된 악성 재고도 무지 하게 많았으며, 심지어 어느 대기업이 이런 악성 재고를 해외지사로 선적 수출 실적으로 잡은 뒤(긴급 운전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해외지사는 몇 년뒤 다시 서울 본사로 콘테이너도 열어보지 않은 채 역 수입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였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이러한 악성재고는 장부상으로는 자산이나 전혀 자산가치가 없는 경우가 많으므로 회사가 문 닫을 때까지 회계상 손실 처리를 하자 않는 경우가 더욱 많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일이 경제 전반에 만연하연 하였을 경우, 그 해 GNP를 긍정적으로 보아 줄 수 있을까?

e.이런 이유로 박정희 말년의 경제는 GNP는 증가하였지만 심각한 외환위기에 봉착하였으며 돈줄인 미국의 눈치를 봐야 하는 일본은 미국에 눈밖에 난 박 정권을 지원하기도 힘들었다.

2) 무역수지문제.

이제 무역수지 문제를 보자. 우리나라는 1970년대 초에 수출 10억 달러를 달성하고 7년 후인 1977년에 수출 100억 달러를 달성, 명목상 높은 경제성장률을 동인하지만 수출을 위해 자본과 원료 그리고 중간재까지 일본 등 외국에 의존해야만 하는 높은 수출증가는 곧 무역수지적자를 의미했고, 우리가 수출을 하면 하는 만큼 수입도 늘어나 경상수지를 크게 악화시켰다. 생산재 수입해서 수출에 썼기에 별문제 없다고? 단기간의 무역적자는 사실 별문제 안된다 그러나 장기적인 무역적자는 달러감소로 투자비감소-->채용감소-->소득증가 곤란, 주식하락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적절한 무역수지와 내수경제성장이 중요하다. 제대로 알고나 반론하시라.

1950년대까지 우리의 무역적자는 원조로 메웠다. 62년도 무역적자 5천 5백만불였는데 71년에는 5억8천2백만불, 74년에는 20억불, 79년에는 30억불로 상승(다만 77년도에만 중동건설붐으로 1200만불흑자)-- 차관으로 무역적자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으나 차관 금액의 40% 가까이를 부채 해결에 쓰게 됨으로써(돌려막기) 악순환이 계속 반복된다. 그 결과 1974년 한국 차관 총액의 65.4%가 일본 차관이었는데, 결국 외국차관을 들여오는 것은 대기업체들이며, 일본의 큰 재벌이 한국대기업체에 막대한 차관을 해줌으로써 경영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독일이 1952년에 이미 무역수지 균형을 이루었고 일본이 1960년대 중반부터 경상수지가 흑자 기조로 된 것과는 대조적이다. 미국, 유럽, 일본 등 자본주의 제1세계는 5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약 20여 년간 전설적인 경제성장을 이룩했다. 그런데 그 공을 특정한 대통령(혹은 수상)에게 돌리는 행위는 없었다.

박정희의 18년간의 통치 기간 매년 38%의 수출증가율을 기록한다. 그리고 전두환 때 16%, DJ 때는 6%정도로 수출증가율이 둔화된다. 이승만 정권 때는 자료입수 가능기간인 57년 이후부터 61년까지 연평균 15%의 수출증가율이다. 그러나 내용을 들여다 보면 57년 2천3백만불이었던 수출액이 58년에는 천4백만불로 감소하다가 이후 집권종료 전 1년간 3천7백만불을 기록하여 연평균 48%의 수출 증가율을 기록한다. 이는 박정희의 38%를 능가하는 수치로서 박정희 집권이전부터 경제발전계획의 수립등으로 인해 이미 급격한 수출증가의 기미가 있었다.

또 수출에 관한한 전두환씨가 지금도 큰소리 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그것이 바로 자신의 집권기간 중 대한민국 유사 이래 최초로 무역흑자를 기록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집권기간 동안 총 638억불을 수출하고 871억불을 수입하여 수출이 급격히 늘었지만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증가한다.

집권기간 중 무려 233억불의 무역적자를 기록하였고 집권종료시기인 79년는 150억불 수출에 203억불을 수입하여 한 해에만 53억불 적자를 기록한다.(70년대 후반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이 지금도의 1/10수준임을 감안하면 79년 한해의 무역적자만 지금의 500억불 적자규모) 박정희 집권기간 무역적자 233억불은 지금의 2000억불 이상의 무역적자 규모에 해당한다.

후임 집권자 중 노태우씨가 132억불의 적자, YS가 366억불의 적자를 기록했고 DJ는 불과 5년 동안에 846억불의 흑자를 기록하여 지금까지 흑자 기조를 유지한다. 정리하여 보면 이승만 정권 때는 수출신장의 싹이 보였고 박정희 집권 18년 동안 높은 수출증가를 이룩했으나 수입 또한 그 이상으로 늘어나 당시 경제규모에 비추어 볼 때 매우 큰 규모의 무역적자를 기록하게 된 것이다. 이를 메우려고 대일청구권 자금, 월남특수, 중동특수 등으로 무역에서 펑크 나는 것을 메웠고 이것도 부족하여 매년 많은 차관을 도입해야 했으며 이 빚은 결국 후임정권이 짊어져야 했다.